종전 직후에 키타큐슈시로 이주했습니다. 전후(戦後) 낙성(落城)의 도가니 속에서 보낸 날들은 이후, 창작자로서 활동하는데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토쿄행」의 플레이트를 붙인 기차를 볼 때마다 「언제가 반드시 이 기차를 타고 토쿄에 간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앰프, 스피커, 레코드 등을 전당포에 맡겨 잔금 700엔과 도구만을 챙겨 토쿄행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오구라에서 토쿄까지는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 때의 구상이 나중에 「은하 철도 999」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 때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면 오싹해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고등학교 수학 여행으로 토쿄에 갔던 것은 있었습니다.
그 때, 출판사에서 원고료로 5,000엔을 받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도쿄역의 「버드나무」앞에서 「나는 반드시 여기 다시 온다」라고 맹세하며 돌아갔으므로 18세에 상경했을 때에는, 우선 그 「버드나무」를 어루만진 후 출판사로 향한다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리운 시절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궁핍했지만, 그 무렵이 인생의 유토피아였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쿄에 온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울고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즐거웠어요. 돈이 없는 학생들과 함께 하숙을 했었습니다.
많은 친구도 생겼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친구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성심성의껏 타산 없이 우정을 쌓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이라고 하는 나무를 지탱해 주고 있는 거대한 뿌리가 됩니다.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지금도 굳건히 믿고 있습니다.